인간과 삶

아픔에 미소지어 질 때, 치유가 된 것.

알깨남 2024. 2. 16. 22:46

'독서대전' 이라는 독서문화축제가 있다. 도시별로 매년 순회 개최하는데, 작년에는 고양시에서 열렸다. 이 프로그램에 자신의 삶을 청중들에게 얘기하는 일종의 '세바시' 컨셉의 이벤트가 있었다. 희망자를 신청받아 3개월 정도 준비시킨 후에 고양호수공원 도서카페 무대에서 강연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남아돌던 시절이었으므로, 나도 참가 신청을 냈다. 거기서 MBC 드라마 '논스톱', '내조의 여왕' 등을 만든 김민식PD의 지도를 받아 원고를 썼고, 나중에는 MBC 신동진 아나운서에게 무대위에서 말하는 법을 배웠다.
 
15명 정도가 준비를 시작했다. 첫 날,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개인별로 대략 풀어놓고, 김민식 PD 로부터 코치를 받았다. 각자 말하는 삶의 이야기들이 다 드라마 같았다. '사람들 모두가 자기만의 영화 한편씩 다 찍고 있구나' 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잘 버텨내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나와 같은 이웃들을 보았다. 그중에서 유독 기억나는 여성 한 분이 계신다. 
 
 

슬픔에 북받칠 때

그녀의 스토리는 처음 대충 얘기할 때부터 절절했다. 경제적으로도 팍팍하고, 시댁 식구들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힘들고, 그 속에서 아무 힘도 되어주지 못한 남편 때문에 숱한 세월을 눈물로 보냈다. 그러다가 쉰이 넘어 알로에 방문판매를 시작하면서 삶이 반등했다.
 
그 분의 착한 심성이 고객을 감동시켰고, 그래서 다년간 판매왕을 하고 계시다는 얘기였다. 삶을 그만 놓아버리고 싶은 여러 순간을 버티면서도, 끝내 잃지 않았던 그녀의 맑음과 순수함을 고객들이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 분의 힘든 결혼 생활 이야기는 가슴이 아렸고, 판매왕 스토리는 흐뭇했다. 내용은 진실했고, 때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는 가슴을 찌릿하게 만들었다. '리얼리티의 감동은 이런 것이구나' 라고 느끼며, 함께 준비하던 우리는 그분께 진심어린 박수를 보냈다.
 
김민식 PD와 우리 모두는, 이 분의 이야기를 잘 다듬으면 청중들을 울고 웃길 수 있고 큰 감동도 줄 것이라 기대했다. 최고의 히트작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슬픈 표정 짓는 여인

 
이분이 힘들고 서러웠던 결혼 생활 이야기를 해나갈 때, 한번에 끝까지 쭉 이어가질 못했다. 중간에 울다가 진정했다가 다시 시작하기를 두세번 반복 해야했다. 
 
준비한 지 두 달 정도 지나, 어느 정도 원고를 완성하고 정리된 내용으로 리허설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 힘든 시절의 고비를 넘지 못하시고, 설움에 북받쳐버렸다. 뒤돌아 눈물을 훔치다가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려야 하니, 시간도 길어졌다. 그러면서 무대위에서 눈물을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못마땅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무대에 서기를 그만두었다. 안타까웠다. 
 
판매왕으로 활동 하면서 건강한 삶을 회복하고 자신감도 되찾은 듯 보였으나, 삼십년은 족히 넘었을 삶의 가시밭길  상흔은 아직 치유 되지 못했던 것이다. 

 

상처의 치유 

 
내 삶 가운데에도, 아직도 가끔씩 머리를 들이미는 쓴 기억이 하나 있다. 몸속에서 미끄덩거리며 기생하고 있는 조그마한 에일리언 같은 느낌이다. 불쾌한데, 이를 처리할려면 미끄덩거리는 머리를 만져야하니 손을 대기가 꺼려진다. 이놈이 고개를 치켜 올리면, 가슴이 쪼그라들고 수치심에 몸도 미세하게 떨린다. 화가 나고, 어깨 승모근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중학교 1학년 때 일이다. 여느 때처럼 학교에서 집으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집까지는 200m 정도 남은 인도(人道)위에서 그 일이 벌어졌다. 나보다 두살 정도 많아 보이는 형과, 스무살 쯤 되어 보이는 키 큰 청년이 내 옆으로 슬쩍 다가왔다. 그 두살 많아 보이는 형은 얼굴이 약간 거무스레 했고, 머리는 칙칙했다. 눈빛이 꺼림찍했고, 몸에서 약간의 쌈닭 기운이 느껴졌다. 그가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야, 너 돈 좀 주라"
 

돈 갈취 모습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아,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구나. 주위에 적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있었는데, 세상이 그들과 나만 있는 공간으로 축소되는 것 같았다. 어떡해야 하나, 쭈삣쭈삣 거렸다. 뭔가를 말해야겠는데 입은 떨어지지 않는다. 난 혹시 그 키 큰 청년이 이 못된 두살 형의 불량행위를 제지해주지 않을까 은근 기대했다. 그 두살 많아보이는 형이 나를 위협하는 동안, 키 큰 청년은 먼 앞쪽만 보고 내 상황을 모르는 듯 걷고 있었다. 그가 내 처지를 알게 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곧, 그 청년이 제법 큰 소리로 위엄있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근데, 어떤 놈이 돈을 안준다고 그러냐"
 

아~, 둘이 한 패였구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구나. 순간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얼마있는 돈을 주어서 이 상황을 해결하는 쪽을 택했다.

 
"50원 밖에 없어요"
 

은색 작은 동전을 꺼내주었다. 50원은 삼양라면 1개 정도 겨우 살수 있는 돈이었으니까, 그때도 별로 아까울 것 없는 돈이긴 했다. 상황은 그걸로 종료되었다. 그 둘은 씩 웃으며 유유히 사라졌다. 문제는 내 자존심이었다.
 
집으로 걷는 동안, 비굴했던 나를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했다. 이 비겁한 나를 어떻게 벌 주어야 하나. 그 선택이 최선이었나. 난 달리기도 빠르고, 게다가 집까지의 거리는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냥 집으로 내달렸어도 됐지 않았나? 그들보다 몸치는 작아도 먼저 한 방 날리고 도망쳤으면 승산이 있지 않았을까. 마음이 심란했다.
 
1970년대 당시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이런 일을 들어보지 못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이 이런 일을 당했다는 얘기도 없었다. 난 아무한테도 이 얘기를 하지 않았고, 세월속에 그냥 묻혀지도록 했다. 하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분노와 수치심이 엉킨 채, 그 기억들은  불쑥불쑥 보기싫은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면 금새 얼굴이 화끈거린다. 50원에 얽힌 나의 분노와 수치심은 아직까지 치유되지 않은 것이다. 

 
 

유재석....

지금은 국민 MC가 된 유재석. KBS 개그맨 공채에 일찍 합격하여 활동을 시작했지만, 6~7년 동안 동기들보다 뒷전이었다. 완전히 웃기게 생긴 것도 아니고, 말투가 특별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개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던 그에게 예상치않은 계기가 찾아왔다고 한다.
 

KBS 서세원의 토크박스 한장면
서세원의 토그박스의 한 장면 - KBS 방송화면

 
유재석이 한번은 서세원의 토크박스에 나갔다. 토크박스는 우리나라 토크예능쇼의 원조다. 여러명이 출연하여 주제에 맞는 에피소드를 한 후, 가장 웃긴 사람이 토크왕이 되는 식이었다. 어느날 유재석은 자신의 중학생 시절(고등학생 시절일수도 있는데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음) 해수욕장 일화를 얘기했다.
 
바닷가에서 놀다가 누나뻘 되는 여자 깡패들한테 돈을 빼앗기는 스토리였다. 그녀들한테 끌려가 탈탈 털리는 얘기를, 자기도 킥킥 웃어가면서 진솔하게 풀었다. 그게 시청자들을 빵 터지게 했다. 본인도 자신의 굴욕사가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고 한다.
 
만약 유재석에게 청소년 시절 바닷가에서 누나 깡패들한테 돈뺏겼던 일이 상처로 계속 남아 있었다면, 그것을 웃음소재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 수치와 아픔을 웃으면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그 상처를 넘어섰다는 분명한 징표이다. 
 
지금의 난 중학교 시절 돈 뺏긴 이야기를 글로나마 쓸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당시 보도블럭 위에서 느꼈던 당혹과 수치심에 얼굴에 열감이 느껴지고 내장이 꿈틀댄다. 교복 호주머니에서 스스로 동전을 꺼내 바쳤던 내 손이 한없이 부끄럽다. 아마도 5년 전이었으면, 이 얘기를 글로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가오' 빠지는 일이니까.
 
 

아픔에 미소지어질 때

이제 이런 미해결된 마음의 종양들을 하나씩 정리하려고 한다. 그리고 유재석처럼 나의 굴욕사를 스스로 웃음거리로 만들만큼 치유해내고 싶다.
 
그래서 40여년 전의 그 형들도 이제 용서한다. 그들도 지금은 선량한 시민이 되어 어디선가 가족들과 행복한 삶을 살고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에게 감사한다. 그들이 있어 난 억울한 일을 겪고 분통해하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릴 단초를 일찍 마련할 수 있었다. 50원이라는 아주 싼 가격에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 버렸을 때, 스스로에게는 어떻게 대해주어야 하고, 상대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갖는 것이 지혜로운지도 이제 배웠다. 
 

아픔도 웃음소재화 할 수 있을 정도로 치유됨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1892~1971, Reinhold Niebuhr)의 ‘평온을 비는 기도'를 나직히 읊어본다. 

 

“주여, 나에게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이미 벌어진 일 자체는 내가 바꿀 수 없다. 그래서 중학생이던 내게 그런 일이 있었음을 이제 온전히 받아들인다. 세상 살다 보면 수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고, 또 그러라고 다양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것이니까.
 
그러나, 돈을 갈취당한 일을 받아들이는 내 감정과 태도는 내가 바꿀 수 있다. 그래서, 50원을 갈취해서 어린 내 마음에 스크래치를 낸 그들에 대한 내 안의 분노는 이제 떠나보낸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들도 좋은 사람으로 행복하기를 바라는 기도로 대체한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태도도 바꾼다. 비겁했다고 오랫동안 스스로를 나무랬는데, 그만 나무랜다. 그만하면 됐다. 어린 중학생에게 충분히 두려울만한 상황이었지 않은가. 대신 수고했다고 토닥토닥 해 준다. 일어날 수 있는 여러 해프닝 중의 하나였다. 
 
아직 완전히 웃을 순 없지만, 입꼬리를 의식적으로 올려 웃는 표정을 지을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이제 시작이니 머지않아 더 환한 미소로 그 일을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있겠지. 그리고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된 만큼, 세상도 그만큼 더 좋아지겠지. 
 
작년 독서대전에서 만났던 그 여성분도 마음의 평안을 더 찾으셨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