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삶

루이 암스트롱의 환한 웃음이 참 좋다.

알깨남 2023. 12. 10. 23:56

일요일이다. 최근의 추웠던 날씨를 생각하면 오늘은 제법 따뜻했다.
새로 이사온 집 주변은 카페나 이색 레스토랑 거리로 제법 알려진 '밤리단길' 로 둘러쌓여 있다. 주말과 휴일이면 좁은 도로마다 차들이 빼곡히 찬다. 아내랑 점심 때쯤 이 부근을 처음으로 한바퀴 돌았다. 
 
카페안에서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연인들, 태국과 베트남식 요리를 즐기러 멀리서 온 가족들도 보인다. 나는 이제 이사 후유증이 다 가신터라 몸도 마음도 홀가분해졌다. 그래서, 집 근처이긴 하지만 마음만은 밤리단길을 즐기러 온 외지 사람들과 같았다.

 

더구나 오늘은 도로변 플라타나스 가지들 사이로 햇빛도 잘  들어와 활력도 더해준다. 소소한 행복에 발걸음도 가볍다. 콧노래도 흥얼인다.


아 ~  What a wonderful world ~ ♪♬ 
 

 

What a wonderful smile !

루이 암스트롱을 작년부터 좋아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노래를 오디오로만 들었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눈여겨 본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한 피드 덕분에 그가 'What a wonderful world' 를 부르는 공연영상을 보게 됐다.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 부르는 모습
루이 암스트롱이 What a wonderful world 를 부르는 모습

 

숙련된 의사의 내시경처럼, 폐부 깊숙한 곳까지 밀고 들어오는 그의  킹 호소력 보이스(voice)도 좋았지만,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의 미소였다. 그가 평상시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다가 감정을 넣는 부분에서 웃음진 얼굴을 할 때면, 빨간 수박이 쩍하고 갈라진 듯 했다. 거침없이 천진했다. 그의 활짝 웃음에는 세상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힘도 함께 느껴졌다.
 
미국에서 흑인 차별이 여전하던 힘들고 암울하던 시기에 성장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 차별이 엄존하던 때에 가수활동을 했던 그였다. 한데, 어떻게 저런 한 점 티없는 어린아이의 웃음을 가질 수 있을까? 존경의 마음이 절로 솟았다.
 
차별받던 자들의 분노와 울분, 그리고 그것을 음악으로 승화한 음악이 재즈라고 어렴풋이 알고 있던터라,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짙은 삶의 애환을 읽어야 할 줄만 알았다. 어쩌면 나는 아픈 현실이 베어있을 그들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이 힘들어 재즈라는 음악을 멀리했고, 특히 그들의 연주 모습은 잘 보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삶의 기구함이 자꾸 상기되어 내가 불편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암스트롱이 한번에 이를 날려버렸다. 삶이 암울할지라도, 그 어두운 상황속에서도 이렇게 천진함을 유지할 수 있었노라고 웃으면서 포효하고 있었다. 하얀 이를 마음껏 드러내며, 눈도 코도 입도 심지어 광대뼈까지 활짝 웃어 재꼈다. 삶의 환경이 어떠하든,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그는 증명해 보인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 처럼 삶을 연주해보자

내가 암스트롱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 같다.  불만섞인 피해자 모드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암울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몸부림으로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암스트롱이 했던 방식 보다는 낮은 방식임을 난 이제 알고 있다. 세상을 온전하게 변화시키는 방법은 분노를 초월한 것이어야 함을 나이 60이 다돼서 깨닫게 된것이다.
 
재즈는 작곡이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맛깔난 연주가 중요하다고 한다. 특히 즉흥적으로 상대와 소통하면서 변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무슨 인종인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가, 어느 가정에서 자랐는가' 하는 것은 한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다. 그렇지만 그런 어쩔수 없는 요인도, 그것들을 토대로 어떻게  연주하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질 수 있음을 암스트롱은 증명해 보였다.
 
그의 환한 웃음을 나도 지어보고 싶다. 꼭 지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