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삶

아프냐? Sorry ! ‘나도 아프다!’

알깨남 2023. 11. 19. 10:56

 

혼자 무인도에 살지 않고서야,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한번도 건들지 않고서 살기는 힘들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게 삶이니, 본인이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을 완전하게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의로 하는 행동도 때로는 불쾌하다고 여겨질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미안해' 라는 말은 내게 힘들어

오늘은 아내와 결혼 28년째 되는 날이다.

그런데 28년 동안 나는 아내한테 '미안해' 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28년 동안 같이 살면서 미안해야 할 일이 한번도 없었던 남편이면 좋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아내가 내 행동과 말에 짜증을 내거나 한숨지었던 횟수를 일주일에 한 번꼴로만 계산해도 1,500회 정도가 된다. 아마 일주일에 한번은 넘었던 것으로 기억하니 이보다 훨씬 더 많을게 분명하다.

 

오늘 새벽에도, 내가 음악을 크게 틀고 작업을 했는데, 무슨 음악을 그리 크게 틀고 하냐고, 동네 사람들 다 깨울 작정이냐고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음악이 컸었나? 작게 한다고 한 건데, 귀가 밝은 아내에게 크게 들렸었구나' 라고 넘어갔다. 

 

냉랭한 두 남녀의 모습
I am sorry

 


 

왜 나는 한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얼렁뚱땅 대충 얼버무리며, 시간의 힘에 기대어 아무일 없었다는 듯 지내는 쪽을 택할까?

 

힘든 이유 1. 남자가 어떻게 고개를 숙이나

거기엔 우선 남성중심 사회에서 몸에 벤 남성우월주의가 깔려있다. 내 나이 또래의 남성들이 대부분 그랬겠지만, 나 역시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집안의 왕이셨다. 그렇다고 우리 아버지께서 유별나신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연배 되신 많은 분들은 그보다 더했던 남성중심사회에서 태어나서 보고 자랐기 때문에, 가정을 이루었을 때 그들이 꾸려가는 가정의 모습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당장 먹고 사는게 급한 상황에서 이런저런 것을 따질 여유도 없었다. 

 

나 역시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그 영향을 다 털어버리진 못했던 것이다. 요즘도 양성평등과 상치되는 내 안의 깊은 의식을 발견할 때면 깜짝깜짝 놀란다.

 

힘든 이유 2. 잘못을 인정하는 건 죽기보다 싫다.

미안하다는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두번째 이유는 내 개인적인 심리에 있다. 나는 아내 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말을 잘 하지 못한다. 이런 말을 하는 순간, 내가 잘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나는 느낀다. 내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정말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가 무오류의 절대자도 아닐터인데도, 내 안의 에고는 자존심 킹(King)인 그런 에고다.

 

그래서 나는 '미안해' 라는 말이 어렵다.

 

 

'sorry' 로 깨우친 '미안해' 의미(意味)

그러다가 영어 원어민들이 우리말의 '미안해' 에 해당하는 'I am sorry' 라는 말을 다르게 사용하는 걸 보고,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다. 그들은 폭넓게 이 말을 사용했다. 상대에게 실수했을 때도 사용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은 일을 당했을 때도, 가령 가족 중 한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거나 또는 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I am sorry 라고 한다. 그러니까 sorry 라는 뜻이 마음이 아프다는 뜻인 것이다. (sorry의 어원에 해당하는 sore 가 원래 아프다는 뜻이다)  

 

'I am sorry' 는 많은 용도로 사용되지만, 그 근본 출발은 '내가 아픔을 느낀다' 라는 의미에서 출발한 것이다. '당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니, 내 마음이 아픕니다' 라는 공감의 표현인 것이다. 이런 의미가 점점 확장되어, '내 말이나 행동으로 당신의 감정이 상했다고 하니, 내 마음이 아픕니다.' 라고 된것이다. 이것을 상대가 사과의 의미(apology)로 받아들일 수는 있겠으나,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완전한 사과의 의미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출처 : MBC 드라마 '다모' 화면

 

 

우리 말의 '미안해' 라는 말도 그렇다.

'미안(未安)' 이라는 말이 '편치않다' 라는 말이다. 내가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는 말은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런 의미를 담아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미안해 라는 말의 출발은, 영어의 I am sorry 와 같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드라마 '다모' 에서 이서진이 상대역 하지원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공감하는 소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차라리 내가 아파버렸으면 더 나을텐데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난 이제 미안하다는 말을 더 자주 쓰기로 했다. 아니, 써야 할 때 제때 쓰기로 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라는 의미로 시작할 것이다. 내 에고는 '마음이 아프다 라는 의미로 쓸지라도, 그런 말을 쓰면 안돼!' 라고 아우성치겠지만 말이다. 

 

이것도 내가 가진 알(egg)의 일부분이다. 오늘도 즐겁게 알을 깨나간다.

 

'여보, 미안해, 새벽부터 크게 음악틀어서!"